진료실 밖 이야기/달팽이 911

나의 911 이야기

이음ᵉᵘᵐ 2018. 9. 14. 11:04

 

“차에 관심 있는 줄 몰랐어요.”

 

내가 911을 탄다는 얘기를 듣고 누군가 내게 했던 이야기다. 평소 차에 대한 얘기를 하지도 않았고, 누가 차를 산다고 해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저 차에는 관심 없는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 같다.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하고. 911을 탄다고 해서 차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차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911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911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차를 살 즈음해서야 911이라는 기종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 전에는 그냥 ‘포르쉐’라는 차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말 그대로 동경이었다. 가지고 싶다거나 꼭 사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그냥 꿈 같은 것. 그것이 얼마인지는 몰랐지만 내가 살 수 없는 가격의 어마어마하게 비싼 차라는 것 정도는 알았기에 감히 소유할 생각까지는 못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더 비싼 차들도 수두룩하고, 누구나 꿈 꾸는 내집마련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지만...

 

언감생심 같은 포르쉐를 나는 왜 꿈 꾸었을까. 

오래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엘란트라. 현대 엘란트라는 우리 집 첫 새차였다. 짙은 갈색의 엘란트라. 

 

시골에 살던 우리는 더 나은 교육을 위해 도시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은 주말 부부가 되었고 걸어서 출퇴근을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주말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중고 프레스토를 구입하셨다. 그게 우리 집 첫 차. 3-4년을 타시다가 차량이 노후한 탓인지 고속도로에서 한번 고장이 난 이후 차를 바꾸셨다. 당시 가정 형편으로는 큰 결심이었다.

 

엘란트라는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에게로, 다시 어머니에게로.. 15년이 넘는 시간을 우리 가족과 함께 했다. 집을 떠나 본적이 없던 내가 포항 기숙사로 들어갈 때 내 짐을 가득 싣고 가던 것도 이 차였고, 휴학을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기숙사를 떠날 때도 함께 였다. 예과 시절 편하게 등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주 구식에 구식 차였지만 이 차 덕이었다.     

 

 

1991년 엘란트라 광고는 지금도 회자된다. 아우토반을 달리는 엘란트라가 포르쉐 911을 추월하고, 따르던 911 운전자가 엄지를 치켜세우던 명장면 (나는 1단이야).  그때였다. 내가 포르쉐를 알게된 것이. 911인지 뭔지는 모르고 동그란 헤드램프가 귀여운 스포츠카. 포르쉐. 세상에는 저런 차도 있구나 싶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911은 꿈이었다. 원하는 꿈 보다는 불가능을 꿈꾸는 것 같은.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꾸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처럼. 그래서 911을 사기 위해 돈을 모은다거나, 큰 돈을 벌 궁리를 한다거나, 어디 값싼 중고는 없나, 얼마나 하나 방법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학생 때는 산더미 같은 공부에 치이며 살았고, 졸업을 해서는 일에 치어서 살았다. 다른데 눈을 돌릴 틈도 없었다. 지금은 길에서 아주 흔하게 포르쉐 차들을 보지만 그 때는 길을 나다닐 시간 조차 없었다. 그렇게 마음에서 머리에서 잠시 잊혀진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전공의 연차가 올라가면서 어느날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왔다. 난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이러고 있는걸까. 열심히 사는 날 위해 선물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바로 그때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는 카이맨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머리 속은 시간을 거슬러 1991년으로 돌아갔다. 잊고 있던 포르쉐에 대한 꿈. 그래, 바로 이거다. 

 

카브리올레 취향은 아니었기에 카이맨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어릴때 보았던 그 차가 911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곧바로 911 구입을 결심했다. 아주 충동적으로. 유지비가 얼마나 드는지,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계산도 하지 않고 일단 사기로 결심을 했다. ‘유지할 수 있는 범위에서 타면 되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을 모아보았다. 졸업하면서 가입한 적금, 현금, 비상금을 모두 합하면 1억 5천 정도. 옵션 없이 구입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은행 잔고가 0원이 되는 상황이 불안했다. 그리고 옵션 없는 911은 타고 싶지 않았다. 이것저것 원하는 옵션을 넣으니 2억 1천, 부가세 포함하면 2억 3천이 필요했다.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당시엔 감이 없었다. 수십만원 내외에서 지출을 하던 내게 100만원, 200만원은 큰 돈이었지만 억 단위는 오히려 덤덤하게 느껴졌다. 

 

뭐에 홀렸는지,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난 차를 계약 했고, 일시불로 지불을 하기 위해 악착같이 저축을 했다. 커피도 안마시고, 외출도 안하고, 겨울에는 난방 대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카푸어는 차라도 있지 난 차를 사기도 전부터 카푸어였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더 지나 내 손에는 911 키가 들려있었다. 어릴때 우리집 엘란트라와 비슷한 마호가니 메탈릭 색상의 911 4S. 

 

차를 구입한 이후에는 고급휘발유 가격이 부담이 되어서 많이 탈 수 없었다. 관상용 911. 그야말로 카푸어의 삶이었다. 잔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 허리띠를 여전히 졸라야했고,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911을 타고 브런치를 먹으로 가고, 드라이브를 하고, 커피를 사서 야외로 가는 꿈을 꿨었는데 정말 그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후회를 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비록 빠듯하지만 내 삶은 곧 지금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내 손으로 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쏘나타를 샀으면 훨씬 풍요롭게 생활했겠지만 주차장에 세워진 911의 동그란 눈매를 보면 하루 종일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바짝 조인 허리띠를 한칸 풀 수 있었다. 잔고가 조금씩 늘어났고, 출퇴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일주일에 두어번은 911을 타고 나들이를 하고 있다. 뒤에서 그릉그릉 들리는 엔진 소리는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바닥에 붙어 미끄러지듯 달릴 때는 어릴 때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며 신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이 현재가 즐겁기도 한 마법같은 모먼트.

 

지금 나에게 911은 위안이다.